화장품 규제가 수출장벽으로…한국, 12개국 참여 ‘글로벌 규제협의체’ 출범
식약처, 서울서 첫 GCORAS 개최…12개국 15개 기관 참여
안전성평가·GMP·할랄 등 규제 강화 속 국가 간 협력 추진
상설사무국·워킹그룹 논의…실제 규제 조화로 이어질지가 관건
세계 각국이 화장품 안전성평가와 제조·품질관리기준(GMP), 할랄 인증 등 관련 규제를 강화하면서 화장품 산업에서도 규제가 수출 경쟁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가 이러한 국가별 규제 차이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국제 협력체 출범에 나섰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9월 7일부터 9일까지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글로벌 화장품 규제기관장 협의체(GCORAS·지코라스)’ 제1차 회의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식약처는 지코라스를 세계 최초의 화장품 규제기관장 협력 플랫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을 비롯해 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 등 아세안 국가와 아랍에미리트(UAE), 브라질, 멕시코 등 총 12개국 15개 기관이 참여한다.
식약처에 따르면 참여국의 화장품 수출 규모는 세계 시장의 약 46%를 차지한다.
화장품도 ‘규제 대응력’이 경쟁력
글로벌 화장품 시장의 변화는 빠르다.
제품 유행 주기가 짧아졌고, 개인별 수요에 맞춘 다품종·소량생산이 확대되고 있다. 인플루언서와 온라인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판매가 늘면서 한 국가에서 출시된 제품이 짧은 시간 안에 여러 국가로 판매되는 구조도 일반화되고 있다.
반면 각국의 화장품 규제는 오히려 강화되는 추세다.
안전성평가제도를 도입하거나 제조·품질관리기준을 의무화하는 국가가 늘고 있으며, 중동과 동남아시아 시장에서는 할랄 인증 등 국가·지역별 요구사항도 수출기업이 넘어야 할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한국도 화장품 안전성평가제도를 2028년부터 단계적으로 의무화할 예정이다.
화장품 안전성평가는 제품이 일반적이거나 합리적으로 예상되는 사용조건에서 인체에 안전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절차다.
국가마다 안전성평가 자료의 범위나 제조관리 기준, 표시·광고 요건 등이 다를 경우 기업 입장에서는 동일한 제품을 수출하면서도 시장마다 별도의 규제 대응이 필요하다.
결국 가격과 품질뿐 아니라 각국 규정을 얼마나 정확하고 빠르게 충족할 수 있느냐가 수출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로 커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이 규제협력 플랫폼 출범 주도
식약처가 지코라스 출범을 추진한 것도 이러한 환경 변화와 관련돼 있다.
개별 국가와의 협의만으로는 국가별로 빠르게 변하는 화장품 규제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규제기관 책임자들이 정례적으로 만나 규제정보와 정책방향을 공유하는 다자 협력체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첫날인 7일에는 한국과 유럽연합(EU), 호주·뉴질랜드 등의 글로벌 화장품 규제와 기술동향을 공유하는 포럼이 열린다.
국가별 규제기관 간 양자회의도 진행된다.
기업들이 실제 수출 과정에서 겪는 규제 애로사항을 놓고 해당 국가 규제당국과 협의하는 자리다.
국가별 상담부스도 운영해 국내 기업이 해외 규제기관 관계자와 직접 상담할 수 있도록 했다.
단순히 규제기관끼리 정책을 논의하는 국제회의에 그치지 않고 국내 화장품업체의 해외 진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제 규제 문제를 협의하겠다는 취지다.
8일 비공개 기관장회의…상설사무국 설치 논의
협의체의 향후 성격을 결정할 핵심 회의는 8일 열린다.
11개국 규제기관이 참여하는 비공개 기관장회의에서는 지코라스 의장을 선출하고 상설사무국을 어디에 둘 것인지 논의한다.
협의체 설립과 운영에 관한 규정을 채택하고 ‘2026 지코라스 선언문’도 마련할 예정이다.
국가별 최신 규제정보를 공유하고 구체적인 규제협력을 지속할 워킹그룹을 만드는 방안도 논의한다.
상설사무국과 정기적인 워킹그룹까지 구축될 경우 지코라스는 일회성 국제행사가 아니라 상시적인 화장품 규제협력기구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각국에서 새로 도입되는 안전성평가나 GMP 등의 규정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사전에 공유하거나 유사한 규제기준을 마련하는 논의로 이어질 경우 기업의 해외 규제 대응 부담을 줄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K-뷰티에는 ‘시장 확대’만큼 ‘규제 장벽’ 대응 중요
이번 협의체 출범에는 K-뷰티 수출 확대라는 산업적 목적도 뚜렷하다.
화장품은 소비재 특성상 시장 진입 속도가 중요하지만 새로운 규제에 대한 대응이 늦으면 이미 확보한 시장에서도 판매가 제한될 수 있다.
특히 안전성평가와 제조품질관리제도는 기업의 생산과 제품개발 단계부터 영향을 미친다.
규제가 시행된 뒤 대응하는 것보다 새로운 규제 도입 과정에서 국내 기업에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확보하고, 국제적인 기준 논의에 참여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브라질과 멕시코 등 중남미, UAE 등 중동 국가와 아세안 주요국 규제기관이 이번 회의에 참여한다는 점도 한국 화장품업계의 수출시장 다변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규제협력기구의 출범 자체가 각국의 규제를 곧바로 통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계 최초 협의체’보다 중요한 건 실제 규제 조화
지코라스의 실질적인 성과를 판단하려면 앞으로 협의체가 어떤 권한과 역할을 갖게 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각국 화장품 규제는 소비자 안전뿐 아니라 자국의 법률과 산업정책, 종교·문화적 기준 등에 따라 만들어진다.
따라서 국제협의체가 만들어지더라도 개별 국가의 안전성평가 기준이나 인증제도를 단기간에 통일하기는 쉽지 않다.
상설사무국과 워킹그룹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단순히 규제 정보를 교환하는 수준에 그칠지, 아니면 시험·평가자료의 상호 활용이나 규제기준의 조화 등 보다 구체적인 성과로 발전할지가 중요하다.
특히 식약처가 지코라스를 ‘세계 최초의 화장품 규제기관장 협력 플랫폼’이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국제협력기구로서의 가치는 ‘최초’라는 명칭보다 실제 참여국 확대와 지속적인 협력, 규제 차이 해소라는 결과로 평가될 필요가 있다.
이번 회의에서 논의되는 상설사무국과 워킹그룹이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운영되는지, 참여국이 확대되는지, 국내 기업들이 실제 해외 통관·인허가 과정에서 겪는 규제 부담을 줄이는 성과가 나타나는지가 향후 지코라스의 역할을 가르는 기준이 될 전망이다.
오유경 식약처장은 “지코라스는 세계 최초의 글로벌 화장품 규제기관장 협력 플랫폼으로, 국제 규제협력을 통해 글로벌 화장품 안전관리 수준을 높이고 K-뷰티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지원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화장품 시장에서 경쟁의 기준이 제품과 브랜드를 넘어 규제 대응력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주도한 지코라스가 국제회의를 넘어 실제 규제 장벽을 낮추는 협력체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가 이번 출범 이후의 핵심 과제다.
